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4박 5일 방한 일정을 소화하며 다수의 인공지능(AI) 파트너십을 공고히 하는 가운데 삼성전자와의 협력에 특히 무게를 실었다.
엔비디아 차세대 AI 가속기 ‘베라 루빈’에 탑재될 고대역폭메모리(HBM)와 저전력 D램(LPDDR) 등 메모리 공급을 넘어 커스텀 칩 관련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협력까지 논의가 확장되고 있어서다.
업계에서는 엔비디아가 국내 기업들과는 개별 사업 영역에서 협력 관계를 맺고 있는 반면 삼성전자와는 포트폴리오 전반의 여러 영역에서 협력 폭을 넓히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9일 황 CEO는 오전 10시께 김포 공항에서 전용기를 타고 한국을 떠났다.
그는 지난해 10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에 참석하기 위해 15년 만에 한국을 들린 이후 7개월 만에 휴가를 목적으로 또다시 한국을 찾으며 광폭 행보를 보였다. 전날에는 광화문에서 분당까지 서울·경기 전역에 있는 AI 파트너 기업들을 만나기 위한 12시간 강행군도 소화했다.
가족과 함께한 휴가 일정 속에서도 최태원 SK 회장과 구광모 LG 회장 등 비즈니스 파트너이자 친구들을 잇달아 만나는 등 사업 행보도 병행했다.
황 CEO는 특히 한국의 핵심 AI 파트너로 삼성전자를 콕 집었다. 그는 전날 서울 중구 신라호텔에서 열린 엔비디아 주최 ‘코리아 AI 에코시스템’ 연회에서 전영현 삼성전자 부회장 겸 디바이스솔루션(DS) 부문장과 비공개 면담을 가졌다.
전 부회장은 해외 출장 중인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을 대신해 황 CEO와 회동했고 “(엔비디아와) 오랫동안 협력해왔는데 (지금까지) 가장 좋은 얘기를 나눈 것 같다”고 말했다.
황 CEO는 “지금은 한국의 시대(Korea‘s Moment)로서 삼성·LG·현대·SK 등 그간 100% 협력해 온 수많은 친구들과 미래 산업을 구축할 수 있게 돼 기쁘다”고 응답했다.
삼성전자는 베라 루빈에 탑재될 HBM4(6세대)와 소캠(SOCAMM·저전력 메모리 모듈)에 쓰이는 LPDDR5X(7세대) 공급 업체로서 입지를 확대하고 있다. 지난 2월 업계 최초로 HBM4 양품을 공급한 데 이어 지난달 HBM4E(7세대) 샘플 역시 업계 최초로 출하했고 지난주 대만 타이베이 ‘컴퓨텍스 2026’에서는 선단 파운드리 공정 기반의 HBM5(8세대) 시제품을 내놓기도 했다.
이 같은 기술 우위를 바탕으로 엔비디아 최대 메모리 공급사인 SK하이닉스의 점유율 일부를 삼성전자가 흡수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업계에서는 삼성전자의 HBM4 시장 점유율이 당초 예상치인 25%를 넘어 35% 수준까지 확대될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전 부회장은 엔비디아와 협력에 대해 “단기간에는 HBM4와 자율주행칩·가속기 관련 파운드리 협력을 논의했다”며 “중장기적으로는 공동 개발 방안에 관한 의견을 나눴다”고 밝혔다. 업계에서는 양사의 협력 범위가 향후 ‘커스텀(맞춤형) 칩’ 분야로 확대될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우선 ‘커스텀 HBM’ 관련 협의가 이뤄졌을 것으로 관측된다. HBM의 최하단 층(다이)에는 로직(연산) 회로인 베이스 다이가 있다. HBM3E(5세대)까지만 해도 베이스 다이는 D램 공정으로 생산됐지만 HBM4부터는 복잡한 신호 처리 체계를 구현하기 위해 4나노(㎚·10억 분의 1m)급 파운드리 공정이 적용됐다.
엔비디아는 가속기와 HBM 간 데이터 전송 병목 현상을 해소하는 데 있어 베이스 다이의 커스텀화를 핵심으로 꼽는다. 삼성전자는 이러한 요구에 맞춰 HBM5부터 베이스 다이에 2나노 파운드리 공정을 도입해 관련 경쟁력을 한층 끌어올린다는 전략이다.
파운드리 사업에서도 협력 범위를 넓히고 있다. 전 부회장은 “(엔비디아와) 4나노·8나노에 필요한 자율주행칩하고 자체 언어처리장치(LPU)의 다음 세대 협력도 논의하는 중”이라고 밝혔다.
엔비디아는 주력 제품인 그래픽처리장치(GPU)·중앙처리장치(CPU)의 위탁 생산은 TSMC에 의존하고 있지만 엣지(단말)용인 자율주행칩 ‘드라이브 AGX 토르’와 LPU인 ‘그록’은 삼성 파운드리에 맡기고 있다. 이는 공급망 다변화 차원을 넘어 삼성 파운드리의 기술력과 양산 역량을 인정하고 있다는 방증으로 해석된다.
특히 그록(현 3세대)의 경우 4세대 제품부터 TSMC가 생산을 맡을 것이라는 일각의 관측에 대해 전 부회장이 직접 선을 그으면서 삼성 파운드리가 차세대 제품에서도 핵심 생산 파트너 지위를 유지할 것이라는 자신감을 피력했다.
황 CEO는 이번 방한 기간 최태원 SK 회장과 세 차례 만나며 SK와의 공고한 협력 관계를 드러낸 데 이어 삼성전자와도 메모리와 파운드리를 아우르는 협력 구상을 공유하며 한국의 AI 칩 공급망 중요성을 재차 부각했다.
배경훈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겸 부총리는 “‘GTC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GTC의 국내 개최 방안도 논의됐다”고 말할 정도로 업계에서는 이번 황 CEO의 방한을 계기로 엔비디아와 한국 기업 간 협력이 한층 긴밀해질 것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