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물은 들어왔는데 파도를 헤쳐나갈 노가 시원치 않다.” 이달 13일 이재명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호텔현대 바이 라한 울산에서 열린 ‘K-조선 미래비전’ 간담회에서 유상철 HJ중공업 대표이사의 발언이다.
국내 조선업계가 슈퍼사이클에 진입하며 수주 기회가 대폭 늘어난 상황에도 선수금환급보증(RG) 한도가 부족해 수주를 포기하거나 기존 계약이 해지될 위기에 처해 있다는 주장이다.
RG는 조선사의 선박 건조 중 지연·부도 등으로 정상적인 인도가 불가능한 경우 금융기관에서 선주에 선수금을 대신 지급하기로 약정하는 보증이다. 건조 계약과 함께 선가의 약 20%를 선수금으로 납입하는 선주로서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이와 마찬가지로 조선사에게도 RG는 선택사항이 아니다. 시기상으로는 분명 RG 한도가 늘어나야 할 상황이다. 최근 국내 조선업계는 슈퍼사이클을 맞고 있다.
코로나 엔데믹 이후 물동량 급증,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중동사태 등으로 인한 에너지 공급망 재편이 불씨를 당겼다.
신조 수요는 많고 조선소는 한정적이다. 선가가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공급자 우위 시장’이다.
그럼에도 중형조선사들이 RG 한도 부족을 토로하는건 이들에게 남은 ‘주홍글씨’ 때문일 것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촉발된 조선소 구조조정이 발목을 잡는다.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 한진중공업(현 HJ중공업), STX조선해양(현 케이조선)이 무너졌다. 과거 0.5%의 낮은 수수료를 내세우며 영업에 매진했던 은행권들이 지금은 ‘신용 부족’을 이유로 RG 발급을 거부하고 있다.
현 시점에서 유지되고 있는 RG 한도는 10년 전 수준이다. 실제로 케이조선은 2022년 8000TEU급 컨테이너선 8척을 수주하고도 RG를 발급하지 못해 계약에 실패했다. 이후 표면상으로 계약 실패 사례가 반복되진 않았지만 내부 속사정은 다르다.
국내 중형조선소들은 RG 한도에 맞춰 수주 전략을 새롭게 짰다. 혹시라도 금융권의 눈 밖에 날까 두려워 문제점을 공론화시키지도 못했다는 게 업계 관계자의 설명이다.
RG 확대를 위한 정부 차원의 노력이 없었던 건 아니다. 한국무역보험공사의 ‘중형조선사 RG 특례보증’이 대표적이다. 시중은행이나 정책 금융기관이 RG를 발급할 때 무보가 최대 95%에 달하는 금액을 보증해준다는 골자다.
다만 국내 중형조선소들의 매출이 조 단위를 훌쩍 넘긴다는 점을 감안하면 규모가 너무 적다. 지난해 확대된 금액이 6000억원에 불과한 실정이다.
결과적으로 ‘K-조선 미래비전’ 간담회 개최는 시기적절한 조치로 보인다. 이 대통령은 보험을 인수하는 방법 등 정부 재정을 통해 중형조선소를 지원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중형조선사들도 한껏 기대감을 드러내는 모양새다. 이들의 기대처럼 하루빨리 케케묵은 RG 문제를 털어내고 지역 경제 활성화와 조선업 경쟁력 제고에 이바지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