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찾은 엔비디아와 인공지능 공급망의 중심
이번 달 초 대만에서 열린 컴퓨텍스 행사에서 SK하이닉스 부스를 찾은 엔비디아 최고책임자는 7세대 고대역폭 메모리 웨이퍼에 특별한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제발 더 만들어 달라’는 글귀였습니다. 세계 인공지능 가속기와 소프트웨어 생태계의 기준을 쥐고 있는 기업 수장이 한국 회사에 전한 말은 요청이라기보다 간곡한 부탁에 가까웠습니다.
사흘 후 그는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닷새 동안 머물며 SK, 삼성전자, 현대차, LG, 네이버, 두산 등 대기업 경영진과 게임사 및 스타트업 대표들을 연이어 만났습니다. 엔비디아에 꼭 필요한 고대역폭 메모리는 물론 클라우드, 데이터센터, 자동차, 로봇, 게임, 플랫폼까지 그가 구상하는 ‘물리적 인공지능’의 재료가 한 국가 안에 거의 모두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엔비디아의 영향력은 최고책임자 개인의 화제성과 맞물려 방한 기간 내내 더욱 커졌습니다. PC방 경품 이벤트와 예능 프로그램 출연, 야구 시구, 삼겹살과 소주 조합이 기업 협력 안건보다 더 주목받기도 했습니다. 엔비디아가 게임 생태계에서 성장했고 한국이 반도체와 게임 문화를 동시에 가진 나라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상한 조합은 아닙니다.
그러나 의문은 남습니다. 그가 한국 기업들과 만난 자리에서 어떤 조건을 제시했는지보다 개인적인 모습이 더 부각된 것이 우리에게 과연 바람직했는지 말입니다.
그를 탓할 일은 아닙니다. 시장과 파트너, 개발자와 소비자를 동시에 끌어안는 것은 기업 수장으로서 당연한 전략입니다. 대중 친화력이 높은 일련의 행사들은 엔비디아 전략이 얼마나 세밀한지 보여줄 뿐입니다.
대응 전략을 되돌아봐야 할 쪽은 한국 기업입니다. ‘더 만들어 달라’에 ‘더 만들겠다’로 답하는 방식은 단기적으로 옳고 빠릅니다. 다만 그런 합리적 선택이 개별 기업 단위로 제각각 쌓인다고 해서 곧 하나의 산업 질서가 되지는 않습니다. 기업이 저마다 엔비디아의 협력 목록에 이름을 올리는 데서 멈추면 한국의 기술과 데이터는 엔비디아의 플랫폼을 따라 흩어집니다.
강한 기업을 여럿 가진 것과 강한 산업을 가진 것은 다릅니다. 물론 최고책임자가 빈손으로 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서울 연구개발 센터 설립을 추진하고 차세대 가속기 우선공급을 둘러싼 협의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엔비디아 생태계를 한국에 더 깊숙이 들이는 일에 가깝습니다.
이 대목에서 대통령이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내건 ‘대체불가 대한민국’이라는 슬로건이 산업의 질문으로 바뀝니다. 대체 불가능한 나라는 좋은 기술을 많이 가진 나라가 아닙니다. 그 기술로 가격과 기준, 조건을 함께 제시하는 나라입니다.
필요한 나라는 협력 대상이 되고, 대체 불가능한 나라는 협력 조건을 먼저 내밉니다. 그런 맥락에서 이번 방한 일정은 한국이 ‘필요한 나라’임을 확인시켰습니다. 동시에 최선단 고대역폭 메모리의 공급 우위만으로는 인공지능 산업 전반의 조건을 제시하는 ‘대체 불가한 나라’가 되기는 어렵다는 현실을 드러냈습니다.
엔비디아와 손을 놓고 폐쇄적인 생태계를 만들자는 것이 아닙니다. 바깥과 이어지더라도 기술의 성과와 산업 데이터, 인재와 운영 경험이 최대한 국내에 쌓이게 해야 합니다. 메모리와 클라우드, 이동수단과 로봇 등 한국 기업 저마다의 역량이 엔비디아의 여러 성과 목록으로 흩어지는 대신 서로의 강점을 연결해 ‘한 판’으로 설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합니다.
역량의 부재가 아니라 연결의 부재가 문제입니다. 한국에는 메모리와 파운드리, 클라우드와 통신망, 자동차와 로봇, 전력과 제조 현장이 모두 있지만 이를 하나의 인공지능 인프라 운영 체계로 묶는 공통 설계가 약합니다. 한국 산업의 과제입니다.
정부도 기업들이 함께여서 더 강해질 수 있도록 뒷받침해야 합니다. 인공지능 시대 기업 성장의 핵심인 전력과 데이터센터 인프라, 산업 데이터 활용 규칙, 핵심 인재 유출 방어, 그리고 기업들이 함께 쓸 수 있는 인공지능 컴퓨팅 기반 마련은 정부가 설계하고 보강해야 할 영역입니다.
“제발 더 만들어 달라”는 요청이 있었습니다. 최선단 고대역폭 메모리 공급의 핵심 축을 쥔 한국은 엔비디아의 플랫폼 권력을 상대로 협력 조건을 협상할 강력한 무기 하나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반도체와 클라우드, 이동수단과 로봇, 데이터센터와 전력이 저마다 따로 도는 한 그 무기만으로 ‘가장 성실한 공급자’라는 한계를 넘을 수 없습니다.
한국 산업의 흩어진 자산을 하나의 인공지능 산업 질서로 엮어 가격과 기준, 조건을 함께 제시할 때 ‘대체불가 대한민국’은 비로소 구호가 아니라 산업의 언어가 됩니다.